봉원사 현성스님 벽담스님

진각스님─"네 가지의 받는 법이 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51회 작성일 14-06-04 15:05

본문

 

"네 가지의 받는 법이 있다"

이 세상에는 진실로   "네 가지의 받는 법이 있다" 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 하셨습니다.

첫째는 현재에는 즐겁지만 미래에는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다
둘째는 현재에는 괴롭지만 미래에는 즐거운 과보를 받는다.
셋째는 현재에도 괴롭고 미래에도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다
넷째는 현재에도 즐겁고 미래에도 즐거운 과보를 받는다.입니다.
그러면 소승이 그 받는 법에 대하여 하나씩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법이 현재에는 즐겁지만 미래에는 괴로움인가?
어떤 사람은 스스로 즐거워하고 스스로 기뻐하면서 살생을 하고, 살생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움이 생기고 기쁨이 생긴다 합니다.
또 그는 스스로 즐거워하고 스스로 기뻐하면서 도적질과 사음, 거짓말 내지
삿된 소견을 가지고, 삿된 소견으로 말미암아 즐거움이 생기고 기쁨이 생긴
답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도 즐겁지만 착하지 않음은 착하지 않음을 따라 생겨나 지혜로 나아가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열반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것을 어떤 받는 법은 현재에는 즐겁지만 미래에는 괴로운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어떤 받는 법이 현재에는 괴롭지만 미래에는 즐거움인가 ?
어떤 사람은 스스로 괴로워하고 스스로 근심하면서 살생을 끊고 살생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이 생기고 근심이 생깁니다. 또 그는 스스로 괴로워하고,
스스로 근심하면서 도적질. 사음, 거짓말 내지 삿된 소견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이 생기고 근심이 생긴답니다.
이렇게 몸고 괴롭고 마음도 괴롭지만 착함은, 착함을 따라 생겨나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을 어떤 법은 현재에는 괴롭지만 미래에는 즐거운 과보를 받는 것 입니다. 또 어떤 법이 현재에도 괴롭고 미래에도 괴로운 과보인가 ?
어떤 사람은 스스로 괴로워 하면서 스스로 근심에 살생을 하고, 살생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이 생기고 근심이 생깁니다. 또 그는 도적질, 사음, 거짓말 내지 삿된 소견을 가지고, 삿된 소견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이 생기고 근심이 생깁니다. 이렇게 몸도 마음도 괴롭고 착하지 않음은 착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지혜로 나아가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열반으로 나아가지를 못 합니다.

이것을 어떤 법은 현재에도 괴로웁고 미래에도 괴로운 과보를 받는 것 입니다. 어떤 법이 현재에도 즐겁고 미래에도 즐거운 과보를 받는가 ?
어떤 사람은 스스로 즐거워하고 스스로 기뻐하면서 살생을 끊고, 살생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즐거움이 생기고 기쁨이 생깁니다. 또 그는 스스로 즐거워하고 스스로 기뻐하면서 도적질, 사음, 거짓말 내지 삿된 소견을 끊고 삿된 소견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즐거움이 생기고 기쁨이 생깁니다.
이렇게 몸도 마음도 즐거우면서 착함을 따라, 착함은 착함을 따라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 입니다. 이것을 어떤 받는 법은 현재에도 즐겁고 미래에도 즐거운 과보를 받는 것 입니다.

부처님이 최초에 하신 설법이 사성제 입니다. 사성제라고 많이들 아시리라 봅니다 사성제의 뜻을 간략하게 적어 보자면
1; 이 세상은 괴로움 투성이다.
2; 괴로움 투성이가 된 데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
3; 원인을 제거하면 괴로움이 사라진다.
4;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는 데에는 방법이 있다.......입니다.

불교는 바로 괴로움, 고苦라는 문제로 부터 출발을 한다고 봐도 됩니다.
싯다르타 태자의 괴로움은 바로 우리 모든 인간의 괴로움입니다.
이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싯다르타 태자는 출가를 하였고, 마침내 이의 해결책을 찾으신 성도인 것 입니다.
따라서 괴로움은 불교의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이의 해결점이 불교의 긍극적 이상인 열반입니다.

그러면 괴로움은 어디서 부터 온다고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
자신의 업으로 부터 온다고 소승은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와 반대인 즐거움의 삶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니까 즐거움과 괴로움의 근원은 바로 자신이 지어온 바 있었던 그에 대한 자신만이 간직하여온 업의 열매라고 봐야겠지요.
예를 들면, 낚시나 사냥을 하면서 대물을 잡으면 즐거워 아우성을 칩니다.
낚시 바늘에 꿰어 끌려오는 물고기는 물 위로 떠올라 수면 위에서 발버둥을 치면서 팔딱팔딱 거리며 끌려 옵니다. 낚시 바늘에 꿰어 아픈 처지에 더군다나 잡아 당기고 있으니 그 물고기의 아픔은 얼마나 괴로움과 고통이겠습니까 ?
그러나 낚시꾼은 그것을 지혜롭게 보질 못하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느끼고 생각하여 끌려오면서 아픔과 고통으로 몸을 파닥 거리는 고기를 보고 즐거워 소리를 지르며 마치 큰 일이나 해 낸듯 자랑을 하며 심지어는 사진도 찍고 그럽니다.

인간은 육도윤회의 갚음으로 엮이고 이어지는 인연법이 있는데 이 글을 읽으시는 회원님들께서는 다음 생에 이 물고기와 낚시꾼의 관계는 어떻게 만날 것 같습니까 ?

옛날 설화를 하나 적어 드리겠습니다.
옛날 어떤 부호의 집안에 자손이 무척 귀한데 이 부호는 결혼 한지 이십여년 만에 귀하게 듬직한 아들을 하나 낳았습니다. 당시만 하여도 아이를 낳으면 스님들을 찾아가 아이의 장래를 알아보고 하던 풍습이 있었는데 이 부호도 자신의 아들을 어떤 스님에게 데리고 가서 아이의 장래를 보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스님이 하시는 말씀은 "이 아이는 정확하게 9 살이 되는 해가 되면 목숨을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부호는 그 말을 믿기 어렵다는듯 몸시 얺찮은 표정으로 집에 돌아온 뒤에 시간이 나면 아이를 데리고 여러 스님들을 찾아 다니며 아이의 장래를 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는 곳 마다 모든 스님들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뒷 산에서 홀로 조용히 수행하고 계신 몰골이 수척하신 스님이 마침 그 집에 가게 되었는데 스님은 아이를 보자 마자 "이 아이의 명이 너무 짧습니다.
이 아이를 소승이 명 다하는 날까지 데리고 있을테니 소승이 이 아이를 데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 하였습니다.
아이의 아버지와 가족들은 그렇지 않아도 얼마 못 산다는 아이를 우리가 좀 더 데리고 살아야 한다고 거절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이 아이는 소승이 데리고 살면서 미래생에는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오래 살수 있는 방법을 일깨워 준 뒤 다시 그대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지금 소승은 살림살이도 넉넉치 않지만 아 아이의 미래만큼은 바꿀수 있으니 소승에게 이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관세음보살 ~!"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품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말에 부호의 가족들은 어렵게 결정을 하여 스님을 따라 아이를 보냈습니다.

스님은 아이를 데리고 가면서 "한가지 당부를 하고 싶습니다. 절대로 아이를 찾으러 오시지도 마시고 소승이 9 세가 되는 해 생일 3 일 전에 다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때 상봉 하시면 그때까지 못해 주었던 것을 다 해주시면 됩니다." 하면서 아이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산 속에서 스님은 끼니를 건너면서도 아이에게만은 끼니를 매번 챙겨 먹이시며 아이에게 참회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길 어느 세월......... 아이의 9 세가 되기 3 일 전 스님은 아이를 불러 앉혀 놓고 "그동안 너는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살았느니라. 오늘 하산을 하여 저 아래 내려가면 제일 큰 집이 있는데 그 집이 너의 부모님이 살고 계시니 그 곳에 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스님이 보내서 왔다고 하여라.
그리고 반드시 꼭 지킬 것은 내려 가다가 절대로 뒤돌아 보거나 되돌아 와서는 안되느니라 알겠느냐 ?" 아이는 스님과 약속을 하고 하산을 하였습니다.
산을 거의 다 내려 왔는데 지난 밤의 큰 비가 온 뒤라 냇가에는 물이 불어나 물살이 제법 세게 흘러갔습니다. 아이는 쉽게 건너질 못하고 스님이 절대로 되돌아 오지 말라는 당부에 아이는 한동안 개울의 물이 빠지길 기다렸습니다.
그때..... 불어난 개울물 위로 썩은 통나무 하나가 둥둥 떠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통나무 위에는 개미가 수만 마리가 붙어 있었고 개미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통나무 위에서 이리 저리 헤메는 것을 본 아이는 살생을 하지 말고 방생을 하라고 일러주신 스님의 말씀이 떠 올라 옆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그 통나무를 끌어 당겼습니다. 그리고 풀 밭으로 끌어 올린 뒤 통나무를 한 쪽에 두고 있으니 개울의 물이 어느 정도 줄었습니다.

아이는 개울을 건너 부호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동네에서는 아이가 왔다고 큰 잔치를 벌리고 부모와 가족들은 모두가 얼싸안고 눈물로 맞이하였습니다. 이제 삼일 후면 이 아이는 죽는다는 생각에 모든 사람들이 말도 못하고 서로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스님은 예전과 같이 절에서 염불을 하고 계셨습니다. 하산을 한 아이의 장래를 위하여 극락왕생을 빌었고 다음 생에는 부디 좋은 곳에 들라고 발원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쪽 산 모퉁이에서 "스님 ~!" 하면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스님은 이 아이가 죽어서 나를 못잊어 찾아온 모양 이구나 하면서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영혼이 아니라 아이가 달려 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스님은 깜짝 놀랬습니다. 분명히 하산 하기전 까지만 하여도 9 살 밖에 못 산다는 관상이 집에서  부모 곁에서 죽으라고 보냈는데 지금 돌아오는 관상에는 분명히 9 살이 목숨이던 아이의 관상이 80 살로 변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은 하도 이상하고 신기해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집에는 잘 다녀 왔느냐?" "예......부모님이 제일 반가워 하셨고 모두가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다녀 오는 동안에 혹시 무슨 일은 없었더냐?"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다시 공곰히 생각 해 보거라.
작은 일이거나 희미한 기억 같은 것을 잘 더듬어 보거라." 그러자 아이는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아.....참, 스님 제가 산을 내려가서 개울을 건너려는데 물이 너무 불어나 있었고 그 불어난 개울 물 위로 통나무가 하나 흘러가는데 통나무 위에 개미가 너무 많은데 떠내려 가는게 안타까워 그 통나무를 건져 내어 풀 밭에 두고 난 뒤에 집에 간 기억 말고는 없습니다."
스님은 갑자기 무릎을 탁 ~ 치시면서 "그랬구나.  장하다.  너는 원래 9 살 까지 밖에 못 살게 태어났단다. 그래서 네가 9 살이 되기 삼일 전 날에 너를 부모 곁으로 보낸 것이다. 부모 곁에서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라고 보냈는데 너는 강물에 떠 내려가고 있는 수많은 개미를 살려 줌으로써 그 많은 개미들의 생명이 너에게 붙어서 너의 수명이 이제는 80 살로 늘어난 것이다.
참말 장한 일을 했구나."

어떻습니까 ? 이해가 되시는지요? 낚시와 사냥 같은 살생은 일종의 오락으로 생각하고 즐기는 경우, 또는 도둑질을 하면서도 그 일에서 쾌감을 느끼는 경우가 즐거움입니까 ? 현재에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더라도 미래에 내가 만날 삶을 생각해 보셨는지요? 항상 진각이는 말하지만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없을진데 사람이라고 다르고 짐승이라고 다르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 하셨듯이 "천상천하유아독존" 인 것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가 존귀한 것입니다. 어떤 법을 다음에 받게 될지는 또 어떤 미래를 만나게 될지는 오늘, 아니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행동 으로 알수 있습니다.
불자는 모름지기 인과응보의 법칙을 알아 철석같이 믿어야 하며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부터라도 악업을 청산하시고 참회로 다시 시작 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생명을 죽이며 살아온 사람이 '나만' 되길 바라면 안 됩니다.
부디 금일참회로 미래를 구하여 봅시다.        
                                      관세음보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